때로 강의라는 인연으로 어르신들을 만나다보면, 각자의 살아온 인생사를 듣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어르신들의 말씀 주제는 크게 젊은 시절의 꿈과 즐거웠던 한때의 추억으로 나뉘는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웃음바다가 된다.
그렇게 한바탕의 웃음이 잦아들 무렵이면 어르신들은 회한을 담아 유수와 같은 세월의 아쉬움을 표현하신다. 그럼 나는 조용히 경청하다가 이런 질문을 드린다.
<윤서영의 아름다운 삶>
“어르신,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시겠어요?”
질문에 어르신들은 각자의 말씀으로, 때 아닌 토론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젊음은 좋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씀하신다. 굽이치는 인생과 말 못할 사연들, “비록 행복만이 가득한 삶은 아니었지만 겹겹이 쌓아둔 나만의 성지를 바꾸고 싶지는 않다”고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문득 질문해 본다.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떨까?
그러면서 또 질문해 본다.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타자’에 보면 70세의 보르헤스가 19세 청년시절의 자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 담겨 있다.
70세의 보르헤스(나)는 젊은시절 보르헤스가 그렇게 원하던 꿈들을 이룬 성공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되고, 70세의 보르헤스는 여러 가지 일어날 사건들을 젊은 보르헤스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년의 보르헤스는 젊은 시절의 보르헤스가 자신과 닮았지만 너무나 다름을 깨닫게 된다.
『반세기가 헛되게 지나가지는 않는다. 잡다한 독서와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 간의 대화 속에서 나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도 달랐고 너무도 닮았다. 서로를 속일 수가 없었고, 이것이 대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둘은 제각기 타자의 성격을 본뜬 모사품이었던 것이다. 』
사람들은 미래를 꿈꾸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나 역시도 그러하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행복할까?
웰다잉을 포괄하는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에 의미가 있고, 시간의 흐름이 있기에 지금의 소중함이 있다. 언제나 젊고, 언제나 행복하며 빛으로만 가득한 세상이라면 그 가치를 알기 어렵다”고 전한다.
비슷한 맥락의 말을 전한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은 이런 말을 하였다. “삶은 멀리서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고 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경제를 비롯하여 모든 것이 힘들고 각박하고 쉼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반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웃음도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도 줄어만 간다.
이럴 때 일수록 잠시 쉼을 가져보면 어떨까.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의 유한함을 되새겨보고, 인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이모든 것 들이 삶이라는 찰나의 순간을 함께 하는 추억이다.
이런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나의 생각이 너의 생각이 되고 우리의 생각이 되어 언젠가는 ‘지금’이 좋은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그런 공동체를 향해 한걸음 또 걸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