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만해/ 서순석

  • 등록 2019.02.24 12: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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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순석(1957~)

서울 출생
인하대 국어교육과 경기대 교육대학원 졸업
1995 시조문학 ‘백자송‘ 등단
정운엽 문학상, 한밭 시조 백일장 입상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입상
2004 시집 ‘바다로 간 만해’ 출간


식민지 형무소
겨울 독방에는
동토를 기어가는
네 가닥 파뿌리로 남아
생존을
흙으로 축복하는
눈빛이 있었다

사형수의 낙서가
시집처럼 남아있는 벽
어머니의 젖무덤엔
겨울 강이 누워있고
숨쉬길 거부한 강은
어미 곁에 누웠다

죽음은
매듭 못 지은
유언으로 남아 있는데
반야경 넘길 책장이
아직도 남아 있음은

나보다
더 슬픈 가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억새야
만해의 늙은 억새야
아직도 보내야 할
바람이 남았는가
얼마나 많은 바다를
용서해야 하는가

시 읽기/ 윤형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라고 천명한 이가 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시를 쓰려면 그에 상응하는 시적 변용이 필요하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적 상상력의 형상화야말로 서순석 시인이 관통한 시작법의 본령이라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만해(萬海)는 한용운의 법호이며 부처의 은덕이 바다와 같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승려 시인이며 독립 운동가였던 그는 1919년 3.1 운동 때,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낭독하고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 생애를 바쳐 온 독립 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절감한다. 올 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 세상에 風雲은 많이 일고 日月은 사람을 급하게 몰아가는데, 단 한 번의 인생을 어찌할 것인가? 여기에 엄숙한 시간의 진지한 모색이 있었다, ’님의 침묵‘이란 절명의 걸작을 남기고 조선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집에 살다가 66세에 입적했다는 만해, 수원 한 모퉁이에 사는 시인의 초려(焦慮)가 ’바다로 간 만해‘란 총백(蔥白)의 시를 내어 놓는다.

일제 강점기 독립과 자주를 갈망한 수많은 애국지사가 갇혔던 ‘식민지 형무소’는 지금 ‘겨울 독방’이다 동토의 뼈아픈 추위가 온 몸에 박히면서 영어(囹圄)의 육신은 겨우 네 가닥 ‘파뿌리의 이미지로 생존’을 이어간다. 총백(蔥白)은 파 밑동으로 이 시의 뼈 건강을 떠받치고 있다. 빼앗긴 땅, 얼어붙은 ‘동토’로부터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는 서늘한 기맥을 제공하는 것이다. 벽에 쓴 ‘사형수의 낙서’는 또 얼마나 처절할까? “어머니, 보고 싶어요. 아들아, 잘 있니? 내 걱정 말고 엄마 잘 보살펴“ 그러나 ‘어머니의 젖무덤’엔 모유대신 차단된 ‘겨울 강’이 흐르는 참담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사물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반야경’의 진리를 믿기에, 시인의 마음은 더 오롯이 ‘슬픈 가슴’이 되고 만다.

마지막 연 ‘만해의 늙은 억새’는 또 무엇을 말함인가? 서순석 시인에게 ‘억새’는 목 힘줄 푸른 동맥이며, 온 누리 휘돌아 감기는 깊은 강의 춤이다. 고향의 흙냄새와 어미의 살 냄새가 저 海原의 바람타고 가난한 시인의 가슴 위로 출렁이는 한, 강 같은 평화와 하해(河海) 같은 은혜로 더 많은 바다를 용서할 수 있으리라.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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