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고의 전쟁영화로 알려진 '제9중대'의 한 장면
소련 젊은이들의 피와 통곡이 묻힌 아프카니스탄의 고지
누구의 점령도 허락하지 않은 신들의 땅에서의 전투
소련의 아프칸니스탄 침공은 지옥이 열리는 날이 됐다.
신들이 사는 땅 아프칸니스탄은 평균 해발고도가 3000m에 이르고 지형이 험해 인간의 접근을 잘 허락하지 않는 땅이다. 또 석회암지대가 많아 곳곳에 동굴이 많고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잉태된 인류의 기원을 논하는 지역이다. 아프칸니스탄으로부터 남쪽으로 가면 파키스탄과 인도로 이어지며 서남방향에는 아랍계가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소련과 동쪽방향으로는 유럽을 아우르는 길목에 아프칸니스탄이 우뚝 솟아 있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대대로 유순한 사람들이다. 아프칸니스탄 사람들이 본격적인 근대적 무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중동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격화되고 소련의 이란지원이 본격화되자 미국은 이라크를 무장시켰으며 소련과 이란을 잇는 아프칸니스에 무기와 군수지원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지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프칸니스탄 전쟁에 징집됐던 소련의 젊은이들
▲ 호송대를 사수하는 9중대
소련은 이란까지의 원활한 수송로 확보와 공산주의 확대라는 미명아래 1979년 12월 아프칸니스탄을 침공한다. 소련의 압도적인 무력은 아프칸니스탄 전체를 쉽게 점령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단 한 번도 외지인의 무력점령을 허락하지 않았던 이들은 무장을 하기 시작하고 소련과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한다. 전 세계를 미국과 소련이 무력으로 양분하고 있었던 시절이었으나 아프칸니스탄에서 소련의 무력은 통하지 않았다. 장장 9년 동안이나 소련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했으나 아프칸니스탄을 이길 수 없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운명의 날, 1988년 9월 소련은 아프칸니스탄으로부터의 철수를 발표한다. 9년간이나 치열하게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던 신들의 땅에서 그들이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립된 지역에 갇혀있는 한 부대는 철수 통보를 받지 못했다. 하필 무전기가 고장이나 소련군 전체가 철수함에도 불구하고 9중대원들은 철수를 하지 못하고 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 가벼운 교전에서 승리한 9중대
‘자르단 3234고지’를 지키는 9중대원들은 아프칸 도착 첫날 자신들과 임무를 교대하고 고향으로 떠나가던 선임병들이 공중에서 미사일 공격을 받아 착륙도중 분해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터에 왔음을 실감하기 시작한다.
결혼한 지 하루 만에 징집되고 혹은 그림을 그리다가 또는 선생이 되어보려 했던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3개월의 전투 훈련만 받고 실전에 배치되어야 할 만큼 아프칸니스탄의 교전상황은 절박했다. 러시아 특유의 단조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의 이별은 누구에게나 가슴아픈 일이다. 이어 훈련이 끝나고 대한민국의 모든 군필자들은 경험했던 일, 치열했던 훈련이 끝나고 나서 수송선을 타고 이름 없는 연병장에 다시 집합해 앞으로 자신이 제대하는 그날까지 복무하게 될 자대에 배치되는 과정에서는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훈련병에서 전투병으로 거듭난 이들은 각자 중대에 배치된다. 훈련병 류타예프, 바라비, 지오콘다, 스타쉬, 추가이노프, 바라비 등은 9중대에 배치되고 전차와 함께 고지를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나무 한 점 없는 아프칸니스탄의 고지대는 사막이다. 바람이 불때마다 일어나는 먼지 속에서 먼지와 함께 날아든 총탄은 동료의 목숨을 가져간다. 9중대가 지켜야 할 고지는 소련군의 호송대가 지나는 주요길목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아프칸니스탄의 공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 누구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지 못했던 아프칸니스탄 전투,
동료들의 시신 앞에서......,
매일 반복되는 공격 속에서 전우들이 차츰 죽어 나가고 본격적인 아프칸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호송대조차 지나가지 않는 길목 위에 서있는 고지를 지키기 위해 9중대원 200여명은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고지를 사수한다. 9중대가 지킨 고지는 소련의 젊은이들, 아직 피어나지도 못해본 젊은이들의 피와 통곡이 서려있는 거대한 무덤이 됐다.
전경만 기자 / jkmcom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