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해외파병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군이 신라에 쳐들어온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경상도에 파병을 한 것으로 시작해, 고려시대에 송나라 파병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광해군이 집권한 시기에 명나라에 일만 삼천여 명의 조총수들을 파병한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었던 광해군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파병하길 거부했으나 당시 집권층이었던 양반들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군사를 파견해 사직을 지켜주었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파병을 주장했다. 왕권이 강하지 못했던 광해군은 결국 강홍립 장군을 도원수로 삼고 파병을 결정했다. ‘사르후 전투’라고 알려진 이 전쟁에서 명나라 군은 대패하며, 망국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후금이 청으로 이름을 바꿔 불같이 일어났다.
▲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근대사에 오면 한민족의 파병은 더 멀리까지 가게 된다.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이었던 지난 1964년 9월, 의무대와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1967년 8월까지 4차례에 걸쳐 국군이 베트남에 파견됐다. 대한민국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육군 9사단(백마부대)을 파견했었다.
베트남 파병의 진실은 여러 논란이 있지만 주한미군의 철수 문제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단독참여한 미국의 여론 의식과 병력 문제 등이 엉켜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한국은 너무 가난했었다. 당시 미국 대사는 한국의 파병에 대해 ‘브라운 각서’를 작성해 넘겨주었다. 각서의 내용을 보면, 파병으로 인한 모든 경제적 부담은 미국이 책임을 진다는 것과 파병군인들이 사용하던 현대적 무기의 한국 이전 그리고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전쟁물자의 보급을 한국 기업에 일부 양해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근현대사를 기록한 여러 종류의 책에서 대부분 베트남 전쟁을 통해 한국이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군인들이 목숨값으로 받아온 달러와 전쟁물자 보급을 통해 늘어난 자산과 인력 그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경부고속도로는 한국 발전의 기초가 된 것이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라가 너무 가난해서 수많은 젊은이의 목숨값으로 나라의 기초를 만든 셈이다. 그리고 나라의 경제와 정치가 성장해진 후에는 우리 돈을 들여 파병했다. 지금의 평화유지군이 중동 여러 지역에 파병된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북한의 병사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러시아로 갔다. 믿을 만한 뉴스는 아니어도 파병 자체는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가난하다고 알려진 나라의 군인들이 정부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한 전쟁에 옳고 그름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파병 나간 이들이 한민족의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과거 베트남 파병의 전례를 보면, 북한도 브라운 각서 비슷한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은 급여와 생명 수당 그리고 무기의 이전 등이 충분히 예상된다. 가난한 한민족의 비극이 과거 남한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북한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