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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혼, 검이불루 화이불치



 세계문화 유산 충남 부여 백제문화단지를 다녀오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문화재를 일컫는 말로 가장 적당하다는 평가를 받는 말이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라는 말의 주인공은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이다. 온조대왕이 고구려를 떠나 한강유역에 터를 잡고 백제와 궁궐을 동시에 건설하고 나서 한 말이다. 확실히 백제의 문물은 보면 볼수록 화려하고 세련된 멋을 풍긴다. 신라의 그것이 화려하면서도 투박한 멋을 자랑하지만 백제는 똑같은 물건을 다루면서도 화려함에 더해 고급스럽다는 멋을 입혔다.

백제의 아름다움과 멋을 보관하고 있는 백제문화단지는 부여 일대의 토지 약 100만평 위에 복원된 부여와 공주의 자랑이다. 백제문화단지는 지난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소산성의 왼편에 만들어진 일종의 백제문화 추모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단지에는 백제의 사비궁과 백제마을 그리고 왕의 사찰인 ‘능사’가 재현되어 있다.

   ▲ 사비궁의 정문 정양문



   ▲ 정양문에서 바라본 사비궁의 내부 모습, 멀리 천정문과 동문 및 서문이 보인다.

우스갯소리로 삼국시대이후로 가장 부유했던 왕을 꼽으라면 백제 ‘성왕’이라고들 한다. 이유는 사비(?)로 왕궁을 이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제의 26대 왕인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로 왕궁을 이전하고, 백제의 최전성기를 일궈냈던 ‘근초고왕’이후 쇠락해 가는 백제를 다시 부흥시킨 인물이다. 복원된 사비궁의 정문은 ‘정양문’이라고 한다. ‘정양(正陽)이라 함은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처럼의 강한 기운을 말한다. 아마도 대백제시대를 열었던 근초고왕의 시절을 생각하며 이름을 지은 것 같지만 실제로 정양이라는 단어는 중국의 성곽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조선의 문과는 조금 다른 이질감을 보이는 정양문은 6칸 규모의 1층과 4칸 규모의 2층으로 이루어진 문이며, 문의 입구는 3문형식으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백제가 요동일부와 일본에게 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황제를 표방한 국가이었다면 문은 3문이 아니라 5문으로 복원하는 것이 더 실질적인 복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양문을 들어서면 아주 넓은 잔디밭과 그 뒤로 내궁이 보인다. 내궁은 백마강을 등지고 보이는 천정문이 보인다. 천정문 옆으로는 동문 그리고 서문이 있다. 또 동문의 옆에는 아주 높다란 건물이 보이는데 능사라고 한다. ‘능사’는 성왕의 아들인 ‘무령왕’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사찰이며 백제의 사찰형태를 고스란히 복원했다고 한다.


   ▲ 사비궁의 중심 건물은 천정전, 백제왕은 천정전에서 대외 업무를 총괄 했다고 한다.

내궁의 정문은 5칸 규모의 천정문이라며 천정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천정전’이 보인다. 천정전은 일종의 대외 업무를 담당하던 건물로 백제의 왕이 사신을 맞이하거나 대소신료를 모두 불러 하교를 하던 자리었다. 천정전의 높이는 요즘 건물로 따지면 약3층 높이에 해당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층간 구분이 없는 그저 높다란 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일종의 복층 구조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또한 내궁에는 동궁과 서궁을 따로 두어 문무신하들과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 했던 건물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집무를 보던 건물도 따로 복원 했다. 이중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은 왕이 머물렀던 충의전이다. 삼국시대의 건물들 중, 왕또는 왕족과 관련되어진 건물들은 일반 건물들과 조금 다른 형태의 지붕양식을 가지고 있다. ‘치미’의 유무에 따라 왕의 건물과 일반 백성의 건물을 구분할 수 있다. 왕족의 건물에 치미를 하는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같았지만 형태는 모두 달라서 백제의 치미는 일본 아스카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 백제 무령왕이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사찰 '능사'

사비궁의 내궁을 돌아 나오면 동쪽 편에는 높이 38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이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바로 ‘능사’다. 능사는 부여 능산리사지를 원형 그대로 복원한 사찰이다. 능산리사지는 국보 287호인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굴된 장소다. 능사는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높이 38m의 능사5층 목탑을 볼 수 있다. 능사의 내부는 거대한 4개의 나무 기둥이 가운데 있는 하나의 대심기둥을 보좌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가끔 중국 수당시대 사찰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면 볼 수 있는 형태의 구성이 이곳에 재현되어 있다.


   ▲ 사비성 후문 능선 뒤에 있는 백제마을, 마을에는 계백장군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능사의 뒤쪽에는 실제 석관과 목관이 잠들어 있던 터가 개방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작은 언덕이 있다. 언덕의 정상에는 백마강과 백제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한번쯤 올라가 백제문화유적이 주는 자부심에 흠뻑 취해 보는 것도 좋다. 특히 백제 마을에는 백제의 대장군 계백의 생가가 고스란히 복원되어 있다. 황산벌의 싸움 귀신 계백의 정기와 불패의 신화를 이루어내었던 사비성은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결국 무너졌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꽃을 피웠던 제국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백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매우 컸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던 백제의 문화는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문화의 주류가 되어 청자에서 백지로 이어졌다.


   ▲ 박물관에 복원 전시되어 있는 '환두대검'의 모습

역사적으로 백제의 몰락은 서기 660년 사비성의 함락과 궤를 같이 하지만 백제의 몰락은 서기 663년 백천강 전투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백제로 돌아와 경기도 주력군과 힘을 합쳐 신라군을 몰아내고, 일본군 27만이 함께 참여했던 백천강 전투가 바로 백제의 최후라고 보는 것이 다. 백제 부흥군이 내분으로 붕괴되기 직전까지 백제 무사의 혼은 한반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리고 당시 백제군이 사용했던 환두대도는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영화 로빈후드에서 로빈이 검을 돌려주기 위해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지고 갔던 검의 형태가 환두대도의 형태다. 즉 환두대도는 신분의 상징이었다.

홍익인간 뜻을 담고 있는 근초고왕의 칠지도와 환두대검을 높이 치켜든 백제군의 함성이 외세의 침략을 맞아 거대하게 펼쳐졌던 백마강 유역은 대제국 백제의 혼을 여전히 강물위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전경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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