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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했던 영남로 제7구간 우중 '구봉산길'



원삼면 독성리에서 백암면 황새울 마을까지
아홉 봉우리마다 굽이치며 흐르는 산의 풍광에 취해


실학자 박제가의 초정집 서문에 보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土臺)를 두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根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경기문화재단에서 매년 진행하고 있는 경기도 옛길 탐방은 법고창신의 정신에 가장 부합하고 있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다.

일찍부터 중앙집권제가 발달했던 조선은 거의 2~3년에 한번 크고 작은 과거를 시행했다. 이때 멀리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 날짜에 맞춰 한양을 향해 길을 걸었다. 조선의 길은 전체적으로 한양을 향해 일직선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조선의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순수한 직선이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길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네트워크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장소에 따라 자연적으로 휘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해가며 한양을 향해 나아갔다.

경기문화재단은 한양을 향해 이어지고 있는 여러 길 중 경기도 구간을 복원해 사람들에게 그 길을 걸어보라 권하고 있다. 재단이 복원한 길은 현재 호남으로 이어지는 삼날길 10구간과 영남으로 뻗어있는 영남길 10구간이다. 그리고 의주로 이어지는 길은 현재 복원 중에 있다고 한다.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 동래까지 이어진다.


    ▲ 구봉산 구간 첫 스타트 지점에서 기분좋게 출발 그러나.....,

지난 14일 있었던 경기문화재단의 영남길 제7구간 답사는 전체 경기도 영남길 10개의 구간 중 가장 어렵다는 코스다. 제7구간은 ‘구봉산길’이라고 하며 경기도 영남길에서 최고의 풍광을 자랑한다. 구봉산은 용인 동북부와 안성을 잇는 산으로 용인 원삼면 독성리에서 백암면 황새울 마을까지의 구간에 있는 산이다.

이번 답사에는 35명의 경기도민이 참가했으며 전체적인 답사 안내는 경희대 민속학 연구소에 근무하는 남찬원 박사가 맡았다. 구봉산 주변으로 아직 개발이 덜 되어 있는 탓인지 사람들의 왕래는 거의 없었다. 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덮고 있는 잡목들만 보아도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구봉산 구간의 전체 길이는 약 10Km 정도 된다. 이번 답사는 초입부분과 마지막 조비산 구간은 생략하고 약 7km의 구간만 하는 것으로 했다. 마침 14일 새벽부터 많은 비가 내렸으나 산행을 시작하기 시작한 오전 9시30분에는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 구봉산 주 능선 바로 앞에 있는 가파른 고갯길

구봉산은 산의 높이에 비해 계곡이 깊은 산이며 암벽 구간은 조비산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산이다. 흙이 많은 산은 계곡이 깊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동안 깍여 나간 것들이 많았는지 구봉산의 주 능선에 오르는 코스의 경사가 심해 어려움이 많았다. 구봉산 입구에서 재단이 준비한 도시락을 나눠들고 오르기 시작한 산길은 시작부터 숨을 차게 만들었다. 비가 온 뒤라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습기가 금새 옷을 젖게 만들었다. 그리고 젖은 머리는 모자와 함께 늘어지기 시작했다. 둥지박물관을 지나 오솔길 구간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뒤에 처지는 사람들이 나타나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오르길 한 20여분......,

도저히 더 이상 못가겠다는 분이 나타났다. 그럴만한 것이 장마 뒤에 습기를 머금은 숲이 내뿜은 물안개는 사람을 쉬 지치게 하기 때문에 산행 초보자는 위험할 수 있었다. 결국 지친 한분과 보호자 한 명은 중도에서 발길을 돌렸다.

잠시 쉬는 틈을 타 남 박사는 “구봉산 구간 길은 원래 고속도로와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따라 걷기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옛 마을길인 구봉산길을 따라 영남으로 가는 것으로 했다”고 한다. “이런 길로 한양을 가면 뭐하나”하는 생각도 잠시 다시 오르는 길은 갈수록 가파래졌다.

능선이 가까워질수록 가파래지는 산길은 급기야 능선을 조금 앞두고 나무 계단까지 놓아야 할 만큼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나무 계단이 없다면 비가 온 뒤라 산위에 오르기 어려웠을 만큼 가파른 산길이다. 이때부터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구봉산 능선에 올랐을 때는 다 왔다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마지막 고비를 남겨두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다독여가면 정상에 도착했다. 구봉산 정상에는 이곳이 구봉산 정상이라는 사람 키 높이만 한 표지석과 사람들이 쉴 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물안개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구봉산 정상의 풍경은 신선도를 방불케 했다. 다만 날이 너무 흐려 멀리 보이는 풍광은 접어야만 했다.


     ▲ 구봉산 정상에서의 식사와 기념사진


    ▲ 구봉산 정상 주변의 풍광

쉬면서 오전에 나누어준 도시락을 꺼내자마자 잠시 멈추고 있었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우산을 펼치며 밥을 먹겠다는 집념을 보이는 사람들......, 비가 오거나 말거나 야외에서 먹는 밥은 무조건 맛있다며 잘도 드신다. 그런데 하늘도 얄궂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출발 준비를 하려고 하니 언제 비가 왔냐며 구름이 물러갔다. 또 보이지 않던 풍광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 하는 감탄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며 카메라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원래 용인 구봉산은 아홉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줄을 이어 이어지고 있다고 해 구봉산이다. 해발 높이도 465m이기 때문에 걷는 맛이 좋은 산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날은 결코 걷기 좋은 구간이 아니었다. 습기와 젖은 땅이 주는 압박 그리고 산 능선을 타고 도는 구름들이 흩뿌리는 이슬비는 산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발목이 시큰 거릴 정도 이었다.


    ▲  구봉산 정상에서 달기봉 구간, 구름과 안개와 함께........,


   ▲ 구봉산 정상에서 달기봉 구간,  힘들다 힘들어........,

제일 앞서 가는 남 박사와 문화재단 관계자들은 산행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후미와 거리가 너무 벌어져 중간 중간 쉬어야만 했다. 구봉산 정상에서 정배산으로 가는 능선 길에는 이름을 잘 모르는 꽃들이 향기를 내면서 집단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산 능선에 이정도 집단 군락을 하고 있으면 이에 대한 지표조사를 할만도 한데 별 설명은 없었다. 구봉산이 용인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이 간접적으로 나타났다.

산길을 가로막고 있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돌들을 치워가며 도작한 달기봉(해발 415m)에서 남 박사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산이 하나 남았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낮은 산이고 쉬엄 쉬엄가면 금방 도착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구봉산을 타면서 우중에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고 내린 사람들에게 또 봉우리 하나를 올라가야 한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 정배산 정산에 선 아낙네들


   ▲황새울 마을 진입로에 도착한 사람들과 마을길을 따라 반계 유형원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고 있는 모습

그러나 실제 정배산은 달기봉과 약 해발 200m 이상의 차이가 나는 낮은 산이었다. 약간의 수다를 떨면서 금방 도착했다. 문제는 정배산에 도착할 즈음 모두가 지쳤다는 것이다. 오후 2시가 넘어가면서 4시간 가까이 산행을 한 사람들의 체력소진이 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내리막길에는 사람의 손이 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길가에 영지버섯들이 있었으며 수명을 넘긴 수염풀들이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산행은 황새울 마을 진입로에 도착하면서 끝이 났다. 황새울 마을 진입로는 안성으로 이어지는 또 새로운 길이다. 그리고 진입로 왼쪽에는 용인팔경의 하나인 조비산이 딱 하니 버티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조비산을 뒤로하고 답사 일행은 황새울 마을길을 따라 반계 유형원 선생의 묘소에 들렀다. 마을길에서 정배산 방향으로 약 500m의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이정표도 없는 야트막한 언덕에 그의 묘지가 있다.


    ▲ 남찬원 박사가 반계 유형원 선생의 묘소에서 선생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과 용인 팔경의 하나인 조비산 전경

 반계 선생은 조선이 낳은 몇 안 되는 천재 중에 한명이다. 남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반계 선생은 조선후기 제1세대 실학자이며 사후 많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사후 백년이 지나 그의 철학과 사상이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죽은 뒤에 벼슬을 하사 받는 사후호사(死後豪奢) 누렸다.

구봉산길 답사는 반계 선생의 묘소 참배로 공식일정을 끝냈다. 황새울 마을 입구에 대기 중이던 버스로 돌아가는 길에 미처 들리지 못했던 조비산의 가파른 절벽이 일행들을 배웅하며 영남대로가 쉽지 않지만 정이 많은 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전경만 기자 jkmco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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