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가득한 도시를 돈과 품을 들여 찾아가 볼 일은 없다. 그러나 담장 낮은 집들이 길게 연결되고 담장 안의 풍경을 슬며시 엿볼 수 있는 도시가 있다면 한 번쯤 가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는 삼청동 주변이 있고, 수원에는 행궁동이 있다. 그리고 더 남쪽으로 가면 군산에 영화동이 돈을 내고서라도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도시다.
▲ 군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본식 가옥은 일제시대 쌀 반출의 아픈 역사를 반증하고 있다.
예부터 군산은 쌀의 도시로 알려질 만큼 곡창지대다. 이순신 장군이 이곳을 지켜냄으로써 임진왜란의 배고픔으로부터 백성을 지켜낼 수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 쌀 반출을 위한 전진 기지이자 수탈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조합 형태로 시작된 농민조합이 군산 옥구로부터 시작됐다. 옥구로부터 시작된 농민조합은 훗날의 한국농어촌공사가 된다.
쌀과 풍요의 고장 군산은 아파트만을 강요하는 최근의 추세와 달리 구시가지를 정성스럽게 가꾸고 다듬어 군산의 대표 관광지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군산 영화동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군산 영화동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인지 정확히 모른다. 외지인의 한계다, 그러나 영화동의 첫걸음은 100년 빵집이라는 ‘이성당’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이성당’이 있는 빵집 거리에 들어서면 길게 늘어서 있는 손님들을 볼 수 있다. 빵이 그냥 빵이지 얼마나 맛있는 빵이길래…. 단팥빵이라고 한다.
▲ 군산, 시간이 멈춘 도시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성당 빵집
▲ 군산 시간이 멈춘 도시의 간판들에는 묘한 데쟈뷰를 불러일으키는 간판들이 많다.
길을 따라 이성당을 뒤로 하고 직진해서 좌측으로 보면 커다란 쉼터가 있다. 영남과 호남이 다른 점이 있다면 호남의 유명한 거리 입구에는 대개 쉼터가 마련돼 있다는 점이다. 전주 한옥마을이 그랬고 여기도 그렇다. 이런 형태의 쉼터는 어느 도시나 계획해볼 만한 일이다. 도시 입구에 만들어진 쉼터는 도시의 얼굴이자 마음이기 때문이다. 오산 남촌동 마을 입구에 이런 쉼터가 있다면 혹은 수원 팔달구 행궁동 입구에 이런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면 하는 상상이 든다.
쉼터의 좌측 옆으로 이어진 길은 비교적 넓고 정비가 잘 되어있다. 과거의 도시임에도 길이 넓고 네모반듯한 이유는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연이 있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호남의 쌀을 더 많이 그리고 쉽게 실어 내기 위해 조선의 옛 모습을 지우고 새로 길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흔적의 하나로 바둑판 모양의 길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쉼터에서 100여m 정도 걸어가면 과거 군청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는 고등학교 야구가 한국인의 재미로 남아 있던 시절의 군산상고를 조명한 간판이 들어온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이 말을 아는 한국 사람은 적어도 40대 이상이다.
▲ 낮술 환영 나도 좋다.
그렇게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재미있는 상가의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간판 하나 ‘낮술 환영’, 술을 좋아하다 보니 낮술이 뭔지 알고 있다. 어미·아비도 몰라본다는 그 질펀하고 끈끈한 유혹 낮술! 낮술 환영에 이르기까지 거리 곳곳의 간판에는 해악이 넘친다. 그러나 시대에 밀려 문을 닫은 인쇄소와 신문사 간판은 마음이 쓰리다. 종이로 접하는 뉴스가 사라지고 핸드폰으로 접하는 뉴스가 대세인 세상에서 인쇄소와 종이신문은 뒷방 종놈보다 못한 신세다.
▲ 밋밋한 골목을 채우는 피노키오가 커피를 마시자고 한다.
골목의 끝에서 다시 한 모퉁이를 돌아 올라가다 보면 뜻밖에 한 사진관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사진관의 이름은 ‘초원 사진관’이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도 아는 단어다. 배우 심은하와 한석규가 주연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작품의 주요 촬영지가 됐던 사진관이다. 사진관 앞에는 배우 심은하가 주차단속을 위해 타고 다녔던 우리나라 최초의 경차 티코를 볼 수 있다.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주 배경이 됐던 초원사진관 모습
이곳에 오면 의외로 많은 영화가, 특히 한국인이면 알만한 유명 영화들이 촬영됐음을 알 수 있다. 영화 ‘타짜’에서 배우 조승우가 도박 기술을 배우는 집과 백윤식이 묘한 소리를 내며 화투를 하던 모습을 간직한 일본식 가옥과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영국빵집’ 그리고 천만 영화 ‘변호인’ 고문 장소 등, 의외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들이 이곳 군산에서 촬영됐다.
군산이 과거를 청산만 하지 않고 보존과 발굴을 통해 미래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한 선택은 또 다른 우리의 여정이자 이야기이다. 군산의 이야기 속, 마음 한구석에 “잘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