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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성> 제국의 숨결, 고려의 역사 안성 ‘죽주산성’

성내에 우물, 계곡있어 테뫼식- 포곡식의 중간형태
최근에 복원된 남쪽방향의 성곽의 높이가 3m가 넘어

 
      ▲ 죽주산성 지도

고려시대에는 동북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제패한 나라들이 많았다. 동이족과 뿌리가 같다는 금나라는 한족이 세운 송나라를 중국 남쪽으로 물리치고 유럽 남부인 터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어 원나라는 오늘날의 독일까지 진격하는 등 세계를 놀라게 했다. 고려는 이런 대단한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북아시아의 패자로써 나라의 위상을 드높였던 강인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고려의 이름이 지금의 영문 국호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정복한 나라들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고려는 중기 말엽 원나라의 침입을 받는다. 원나라의 침입은 총 11번에 걸쳐 있었다. 그중 제3차 침입당시(1223년) 안성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69호)에서 방호별감 송문주(宋文·) 장군은 원나라 대군을 상대로 큰 승전을 올린 장군으로 유명하다. 당시 송문주 장군은 원나라의 공격방법을 미리 예측해 방어를 한 후 다시 공격해 원나라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장군이다.

송문주 장군이 지켜낸 죽주산성은 청주와 충주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안성 동북부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죽주산성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신라산성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죽주산성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훼손정도가 심해 정확한 연대기를 측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라가 충주를 ‘중원’이라 명하고 북진의 거점으로 삼을 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는 것을 보면 신라 군부에서 충주와 청주의 요충지인 이곳에 성을 축성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죽주산성이 신라계열이라는 것은 죽주산성보다 더 동서쪽에 위치한 용인 할미산성(마고산성)이 신라산성이라는 점도 한 몫하고 있다. 경주에서 시작한 한반도 실크로드의 정확한 위치가 다 재현된 것은 아니지만 경주-상주-충주-안성북부-용인동부-화성 당항성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당나라 교역로를 상상해볼 때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다.

죽주산성의 정확한 현재위치는 안성시 일죽면 비봉산과 능선을 마주하고 죽주산 정산에 있다. 산성의 형태는 산정상부를 성곽이 감싸는 테뫼식 산성이지만 테뫼식 산성치고는 규모가 크며 산성 내부에 우물터와 계곡이 있기 때문에 테뫼식과 포곡식의 중간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 홍예문 형식의 동문

산성을 방문할 때 주로 사용되는 출입문은 죽주산성의 동문이다. 동문은 옹성이 없는 홍예문(아치형) 형식이며 성벽안쪽으로 약간 들어와 있다. 동문을 제외한 나머지 북문, 서문, 남문은 모두 현도문 형식이다. 통상 홍예문 위에는 누각과 같은 건물이 올라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죽주산성의 동문에는 누각이 없다. ‘옹문(擁門)’ 대신 성문을 보호할 시설을 대처하기 위해 성문의 위치를 성문 안쪽으로 들여다 놓는 양식은 신라가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다. 신라가 성문을 안쪽으로 들여다 놓고 성벽에서 성문을 보호했다면 백제는 성문의 출입구를 ‘ㄱ’자로 꺾어 성문을 보호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동문에 들어서면 정면 11시 방향으로 우물터가 보이며 2시 방향으로는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동문에서 동쪽 성벽으로 걸어가면 성벽의 경사가 급해지며 성벽의 높이 또한 3m에 달할 정도로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성벽이 축성되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성벽에서 죽주산 원림사이에는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의 공간이 비어져 있다. 동문을 따라 계속해서 전진을 하다보면 북문포루에 도착한다.



   
▲ 포루에서 내려다 본 전경

북문포루는 멀리 청주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날씨만 좋다면 산 아래에서 움직이는 군사들의 동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포루가 있다.

이곳에 성을 쌓은 이유를 정확히 알려면 포루에 오면 알 수가 있다. ‘ㄷ’자 형태의 포루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대포를 거치한 열쇠구멍 모양의 포거치대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성곽 포대문양과 흡사하다. 북동쪽에서 적군이 몰려 내려 왔다면 이곳에서 쏘는 대포를 피해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둥근 타원형 모양의 포대를 거쳐 북문 방향으로 가면 다시 작은 문을 만날 수가 있다. 마치 암문(성벽 내부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출입문-첩자 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문)처럼 보이는 작은 출입문이 보인다. 죽주산성의 북문으로 알려진 이 문은 죽주산성에서도 가장 내부 깊숙한 쪽에 만들어진 문이다. 규모가 워낙 작아 군사들의 출입문으로는 보기 어려웠다.

북문에서 다시 남문방향으로 300m 정도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 복원된 외성벽이 보인다. 내성벽과 직각 형태를 이루며 죽주산의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뻗은 이 성벽은 근래에 복원한 성벽이다. 내성벽은 현재 없지만 그 터는 남아 있다. 북쪽으로 올라가는 외성벽을 따라 150m를 더 올라가면 성벽이 다시 직각으로 꺾여 서쪽을 향하게 된다. 근래에 복원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성벽을 직각으로 꺾어서 서쪽을 향하는 축성방식은 왜성이나 백제계열에서 보이는 방식이다. 성벽을 복원하면서 어느 시대를 기준할 것인지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혼란스러운 복원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 서문과 측성

서쪽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 서문 옆에 측성이 보인다. 측성은 죽주산성에서 비봉산으로 연결되어 있는 능선위에서 약 200m 가량 이어진다. 측성의 양쪽에 위치한 경사면 아래의 길들과 계곡에서 산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주산성의 측성을 넘어야 했을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죽주산성과 측성사이에는 문이 하나 있다. 영남사람들이 과거를 보기위해 한양에 가려면 이 길을 넘나들었다고 하며 측성 옆의 서문은 영남대로 구간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측성에 대한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는 돌무덤들의 연결만 남아 있다. 산과 산 사이의 능선을 따라 만들어지는 측성의 중요성은 남한산성이나 수원화성에서 매우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 이곳에까지 그 중요성이 전파되지는 못했나 보다.


   ▲ 죽주산성 남문치

다시 발걸음을 남쪽으로 돌리면 치성이 보인다. 아직 완전하게 복원되지는 않았다. 성벽외곽으로 툭 튀어나온 치성은 외곽성벽을 방어하는 방어시설물이다. 치성에서 보초를 서게 되면 성벽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오는 적들을 발견하기가 용이하며 대규모 전쟁 시에는 치성에서 적들의 성벽침탈기구를 물리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보이는 남쪽방향의 성곽 높이는 3m가 넘는 대단한 높이를 자랑한다. 또 성벽 밑으로는 경사가 급해 절벽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의 아찔한 높이와 경사를 보여주고 있다. 아직 여장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좀 위험하기는 하지만 산성이 왜 높고 가파른 곳에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곳이 바로 죽주산성의 남서쪽 성곽이다.

남문에 이르기 전에 또 하나의 ‘치’를 볼 수가 있다. 남문치는 일반적인 ‘치’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큰 치가 보인다. 아마도 죽주산성의 남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치의 규모로 봐서는 ‘노대’를 설치하거나 포를 설치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현재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죽주산성은 해발 250m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안성일대의 고도가 낮아 250m 라고는 하지만 북부와 동남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죽주산성은 경기남부의 요충지임이 확실하다. 죽주산성의 외곽 성곽의 길이는 약 1.8km 이며 한 바퀴를 다 돌아보는 데는 1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죽주산성은 고려의 대몽골 전승지이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그리고 당나라와의 교역을 위해 반드시 지켜내야만 했던 우리의 역사이다. 특히 죽주산성은 황제의 국가 고려가 무력으로는 점령당하지 않는 불패의 국가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전경만 기자 jkmco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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