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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성>통한의 역사 남한산성

제1편, 인조 “우익문을 걸어가다”
정조 "병자호란과 효종을 잊지 말아야", 무망루 현판 하사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시대에 축성되고 다시 정조(조선 22대 임금)에 이르러 증개축 된 산성으로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한이 서려 있는 산성이다. 송파나루 남쪽에 위치한 남한산성의 길이는 총8km에 이르며, 남한산의 능선위에 성돌을 쌓아 만든 성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의 바깥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지만 안쪽은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읍성(성안에 백성들이 살고 있는 산성) 형태의 산성이기도하다.

남한산성은 대형 산성답게 동서남북에 각각 큰 출입문이 있으며 16개의 암문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은 남쪽 방면으로 3개의 옹성과 동쪽과 북쪽 방면으로 각각 1개의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인조 2년, 남한산성이 축성될 당시에는 옹성이 없었다고 한다. 옹성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청나라의 화포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로 정조의 개보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다.


    ▲ 남한산성행궁의 입구


   ▲ 남한산성행궁은 왕이 집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남한산성과 이곳의 자랑거리인 남한산성 행궁(상궐 73칸, 하궐 154칸)은 유사시 왕이 이곳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와 집무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또한 숙종 때 행궁 옆에 좌전을 설치해 한성 종로3가의 종묘이외에서도 조선 건국과 관계된 자들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아 남한산성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임금의 영정과 사직을 모신 좌전(左殿)은 볕이 잘 드는 행궁의 왼편 언덕에 만들어졌다. 종묘를 모신다는 뜻에 맞게 엄숙한 분위기가 건물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좌전은 조선의 열왕들이 종묘사직을 모시기 위해 심열을 기울였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건물이다.

좌전을 지나 수어장대 방향으로 산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서 뜻밖의 건물을 하나 볼 수 있다. 바로 숭렬전(崇烈殿)이다. 건물의 이름에 ‘전’자를 붙인 것으로 보아 왕과 관계된 건물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왕을 모신 곳이 아니고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신 사당이라고 한다.


   ▲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영정을 모신 '숭렬전(崇烈殿)'

기원전 18년 백제의 온조왕이 한성부근에 백제를 개국하고 개로왕이 아차산 전투에서 사망하기까지를 한성백제의 시대라고 한다. 한성백제시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비밀과 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설화들 중 하나가 바로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의 성이라는 설이다. 실제로 남한산성의 북쪽 성벽은 고구려 양식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서쪽과 남쪽은 일부 성벽은 백제와 신라 양식의 성벽들이 간혹 보인다.

숭렬전은 인조임금이 온조왕의 영정을 모셨으며, 정조임금이 사당을 완성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의 임금들이 삼국의 시조들을 고루 추앙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다.

남한산성의 정점으로 알려진 수어장대를 보기 위해 보기 산을 올라가는 동안 정성스럽데 다듬어진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조선의 왕들이 왕실의 나무로 소나무를 귀하게 여기었음을 이곳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행궁이 있는 모든 곳에서 소나무는 귀중한 대접을 받았다. 남한산성도 왕의 명에 의해 소나무들이 식재되고 가꾸어졌다고 한다.


   ▲ 남한산성의 군 지휘부 역활을 담당했던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최고봉인 수어장대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면 최근 완공된 제2롯데월드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수어장대에서 남산이 바라보인다고 하니 남한산성이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성을 지키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수어장대는 자연석을 이용해 기초를 닦고, 목조를 이용해 만든 2층 건물이다. 2층에는 영조가 친필로 하사한 ‘무망루’라는 현판이 있다. 무망루는 영조 27년(1757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2층의 수어장대 내편에 걸린 현판이다. 또 ‘무망루(無忘樓)’란 병자호란과 효종의 8년 볼모생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한 조선 후대 왕들의 굳은 결의다.

수어장대가 위치한 마당 한편에는 담장의 한축을 이루는 거대한 기암괴석이 있다. 돌의 가운데에는 수어장대라는 음각이 새져져 있으며 낙인도 있지만 탁본을 뜨기 전까지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풍화에 녹아버렸다. 또한 이 바위에는 남한산성을 축조한 이서장군의 설화가 있어 ‘매’바위라고도 하며, 수어장대터의 기를 누르기 위해 있다는 설도 있다.

다시 수어장대를 내려와 서문으로 비교적 작은 문을 만나게 된다. 남한산성의 서문은 남한산성의 4개 문중에 가장 작은 문이다. 서문을 통해 나가면 송파(송파나루)방면으로 나갈 수 있으나 길이 험해 서문을 통해 물자 등을 운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  한강과 마주하고 있는 남한산성의 북서쪽 성벽은 한강을 조망하기 좋다. 성벽은 고구력식 축성양식을 볼 수 있다.


  ▲ 남한산성의 서문인 '우익문' 인조는 이문을 통해 걸어나가 청나라에게 항복을 했다. 그래서 '통곡의문'이라고도 한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서문을 통해 나갔다고 하여 ‘통곡의 문’이라고도 하는 서문은 석재를 이용해 홍예문형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정조 임금이 서문을 개축해 ‘우익문’이라 칭했다고 하며, 서문의 정식명칭은 지금까지도 ‘우익문’이다.

우익문에서 다시 북문까지는 10여분 정도만 걸어가면 된다. 가는 길에는 옹성이 있다. 청나라의 화포로부터 주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그란 형태의 치성이다.

북문은 남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주문으로 서문보다 큰 위용을 자랑한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는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성문을 열고 청나라 군대와 접전했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에 밀려 몰살을 했던 피와 살육의 장소이다. 이 전투를 법화골 전투라고 한다. 정조 3년에 북문을 개보수 하고 ‘전승문’이라는 칭호를 받아 지금도 북문을 ‘전승문’이라고 부른다.


   ▲  남한산성의 주 출입문 중 하나인 북문


  ▲ 북문의 장군목 설치 부분

북문은 나무와 철을 혼합해 만들어진 문 뒤쪽으로 적군의 정문 돌파를 막기 위한 장군목 설치부분이 석재를 깎아 만들어져 있으며. 자연적으로 발생한 물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포곡시설도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에서부터 숙종, 영조, 정조에 걸쳐 끊임없이 개보수 되고,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된 산성이다. 조선 왕의 항복이라는 역사를 간직한 슬픔과 치욕의 현장인 동시에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무망루가 세워져 있는 우리의 역사다.

전경만 기자 jkmco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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