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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성> 백제 장인들이 만든 전사들의 요람

불패의 산성 오산 독산성 제2편, 

" ‘칠지도’를 만들어 왜국에 하사할 만큼 역사적으로 가장 화려한 문물을 자랑했던 백제인들이 만들어 낸 독산성"

서문의 남쪽에 가깝게 위치한 ‘서남치’는 성벽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며 매우 아름다운 각도를 그리고 있다. 성벽의 기단에서 상부로 올라오는 성벽의 곡선은 한국의 버선코를 닮았다. 그리고 기울기는 일본의 성곽과도 닮았다. 이런 형태의 ‘치’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이다.

독산성이 아주 오랜 시간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후기를 빛낸 정조임금이 독산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선후기에 까지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이다.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장용위’는 정조의 친위부대였다.

덕분에 독산성의 남쪽 성벽은 백제의 성곽양식위에 조선의 기술이 덧칠해져 있다. 서쪽 성벽에서 ‘서남치’를 기준으로 직각으로 꺾여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불가사리처럼 고불고불하다. ‘서남치’에서 남문을 향해 100여 미터를 가면 성벽 사이에서 배수구를 볼 수 있다. 배수구는 성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벽 배수구 관리가 허술해 잡목에 가려져 있으나 배수구가 있다는 것은 이곳에 군인들과 군속들이 함께 거주하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실제 배수구 주변에는 나무가 없는 계단 형식의 둔턱 들이 많다. 관리를 잘했다면 모두 건물지이기 때문에 잘 보존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고 잡풀들만 무성한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 독산성 '남암문'


  ▲ 독산성 남암문, 암문아래는 절벽이다. 이곳에 암문을 만들어 밧줄을 타고 출입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든 암문은 성벽의 안쪽에 있어 외부에서 관찰하기 어렵다. 특히 독산성의 암문은 절벽위에 있기 때문에 외부인이 감시하기 어려운 구조다. 

배수구를 지나면 암문이 나온다. 독산성의 남쪽경사는 떨어지면 즉사할 정도의 경사를 보이고 있다. 이곳에 암문을 설치한 것은 독산성의 남문이 독산성의 주 출입구이고 남쪽을 통한 왕래가 잦았음을 의미한다. 또 과거 기록에 보면 백제의 산성은 밧줄을 타고 성문을 들어가야 할 만큼 가파른 곳에 산성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많다.

독산성 안쪽에서 암문을 빠져나와 보면 바로 아래가 절벽에 가깝다, 밧줄 없이 쉽게 내려가기 어려운 구조다. 암문의 중간에도 문을 달았던 흔적들이 보인다. 암문과 남문 사이에는 상당 히 큰 ‘치’가 하나 있다. 아마도 남문과 암문을 보호하기 위한 구조다. ‘남서치’에 해당하는 이 ‘치’위에 건물이 있었다면 암문을 통홰 왕래하는 모든 이들을 한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 남문과 암문 사이의 '남서치' 높이가 남다르다.
 치 하단부의 잡풀을 제거하면 치가 3단 구조로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다섯 손가락으로 펴 놓은 것처럼 되어 있는 남쪽 성벽의 핵심은 남문이다. 독산성에서 가장 큰 문인 남문은 조선 정조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백제는 성벽을 축석할 때 평평한 돌을 갈아서 석축을 했다. 반면 조선의 성돌은 대체로 ‘뜬돌’을 사용했다. ‘뜬돌’이란 큰 암석에 물을 넣어 인위적으로 쪼갠 돌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독산성 남문은 뜬돌을 사용해 만들었다. 그래서 성벽자체의 무늬가 기존의 독산성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 남문과 암문 사이에 있는 두 개의 '치'

그리고 남문이 중요한 이유는 남문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이어지는 성이 원래 독산성의 내성이고 서쪽은 외성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남문을 통과해 직선방향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내부에 2중의 나선형 성벽이 수풀에 가려져 있다. 겨울에만 볼 수 있는 내부 성벽은 수풀과 잡목에 잠식되어 가고 있으나 그 흔적이 매우 뚜렷하며 일부 석축은 아직도 건재하다. 남문에서 시작돼 내부로 이어지는 성벽의 방향은 ‘서북치’로 이어진다. 추측을 해보면 독산성의 남문에서 ‘서북치’로 이어지는 구간이 백제의 독산성이고 서남쪽 구간은 조선시대에 증축한 성벽이라고 볼 수 있다.

남문의 양식은 ‘현도문’이다. 길이가 4m정되며 높이는 3m 정도다. 성돌은 뜬돌이며 화강암들이 주로 사용됐다. 남문에서 가파르게 동쪽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페루의 ‘마추비추’를 보는 것과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남문이 원래 없었다고 가정하면 남문이 있던 곳에서 성 안쪽으로 'ㄱ'자로 꺾어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석이기 때문에 성 안쪽에 성벽의 흔적이 이중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남문과 암문 사이에는 두 개의 치가 부채살 모양의 간격으로 붙어 있다. ‘남서1치’와 ‘남서2치’다. 다른 치들에 비해 크고 모양이 견고한 것으로 보아 치위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서2치’와 ‘남서1치’에서는 오산의 세교신도시가 정면으로 보인다. 그리고 ‘치’ 밑으로는 아찔한 절벽이 눈을 어지럽게 한다.


   ▲남문의 정면 모습

남문에서 다시 동쪽으로 오르다 보면 ‘동남2치’가 보인다. ‘동남2치’는 남문과 동남치 사이의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동남2치 정도의 높이에서 잠깐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백제 전사들의 무혼이 느껴진다. 서쪽에서는 당성을 신라군에게 점령당해 바닷길이 막혔으며 남쪽에서는 왕이 당나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전사들의 울분이 ‘동남2치’의 절경에서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남문에서 '동남2치'로 가는 계단 구간

‘동남2치’에서 성벽은 안쪽으로 급하게 휘어지며 동쪽으로 향해 뻗어있다. 남쪽 성벽의 맨 마지막 부분에는 독산성 제일의 조망지로 알려진 ‘동남치’가 있다. 독산성에 오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그곳에 서보는 ‘동남치’는 독산성의 명소다. 동남치에서는 동문과 오산 끝자락을 조망을 할 수 있다. 또한 동남치에는 바로 옆에 멋들어진 노송이 동남치에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 수많은 연인들의 밀어가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동남치에서 직각으로 꺾인 성벽은 동문을를 향해 가고 있다. 동쪽 성벽은 일직선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안으로 휘어있다. 동문을 성벽 깊숙한 안쪽에 넣고 양 끝에 치를 만들어 성문을 보호하고자 했던 백제인들의 장인정신과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지역이 동쪽구간이다.

동남치와 동문 사이에는 보적사가 있다. 원래 보적사는 독산성 전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작은 암자 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최근 몇 년 사이 독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가장 많이 훼손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마스가타 형식의 동문은 동문위에 보조방어시설(니시마루)을 가지고 있으나 보적사가 건물을 증축해 지속적으로 사적을 훼손하고 있다.


   ▲ 동남쪽 '치'중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동남치' 독산성의 명소로 꼽힌다.

보적사 뒤편으로는 독산성의 핵심인 천수기단이 자리 잡고 있다. 천수기단이라는 말 자체는 일본성곽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따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별로 없어 천수기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세마대라고라고 불리는 천수기단 부분은 독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직사각형의 석축위에 만들어진 지휘부이다.

일본이 만든 왜성과 독산성이 흡사하다면 독산성 세마대 즉 천수기단의 서쪽으로 석축으로 만든 돌계단이 있어야 하지만 현재 수풀과 흙에 가려 찾을 수가 없는 부분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남쪽에는 세마대가 천수기단임을 증명하는 별도의 석축들을 찾아볼 수 있다.

불패의 산성 독산성은 독산의 가장 높은 곳에 지휘부를 만들고 그 아래 북암문과 동문에 비상구를 두고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 형태의 산성이다. 항라리‘독’자를 쓸 만큼 가파른 산위에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곳을 무력으로 점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신라인들은 백제의 석축 장인들을 불러 석가탑과 무영탑을 만들었을 만큼 백제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훌륭했다. ‘칠지도’를 만들어 왜국에 하사할 만큼 역사적으로 가장 화려한 문물을 자랑했던 백제인들이 만들어 낸 독산성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역사적 보물이다.

/전경만 기자 jkmco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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