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봄 소리/ 권영호

권영호(1946~)

경남 마산 출생

경기 한국수필 신인상

경기시조 신인상

수원 인문학 글 판 우수상

현 경기 수필 및 수원 문인협회 감사

 

 

아직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직은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려

쉬었다 가는 햇살

탓하지 않으며

 

겨우내

서린 입김 여물 씹던

암소 기지개 켜면

산고(産苦)를 참다 못 해

울음 터진

목련 봉오리

 

놀란 까투리 한 마리

푸드득

하늘 박차 오른다.

 

시 읽기 / 윤 형 돈

 

그래, ‘민달팽이’처럼 땅바닥 끌어 열심히 더듬어 보아도 무언가 분명히 잃어버린 게 있다 이 것 저 것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노경(老境)이 되었어도 이번 겨울은 정말 너무 했다 겨울다운 겨울의 품위 손상으로 많은 자연인들이 피해를 보았으며 ‘겨울 동화’ 속편은 아예 꿈도 꾸지 못 했으니까.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떠난 후 ‘기생충’의 광풍이 휘몰아치더니 곧 이어 전 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역병이 미친 듯이 곳곳을 돌며 산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아뿔싸,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야 이 재앙이 지나 가려나! 거리는 지금 영혼이 없는 마스크 좀비들의 확산으로 숨 막히는 지옥이 되어간다.

 

재난 영화보다 더 리얼한 유증상자 현장을 날마다 생중계하고 있으니 지구인 모두는 숨통을 조이며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 격리, 자가 병동에 수감되어 지구 최후의 밤을 맞고 있는 형국이다. 비몽사몽 속절없이 너와 나는 태연하게 지구를 떠나는 연습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들린다.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려 쉬었다가는 햇살‘도 쪼여본 지 오래다. 그러나 일부러 ’귀 기울이지 않고‘ 탓하지 않으리라 어린 날 체득한 봄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있기 때문에 정서적 둔감이나 와해된 언어는 있을 수 없다 ’겨우내 서린 입김‘으로 ’여물 씹던 암소‘의 철학자와 같은 모습을 어찌 망각하랴 ’산고(産苦)를 참다못해‘ 해산하는 임산부의 몽우리가 ’목련 봉오리‘를 달고 터질 날도 멀잖다.

 

옷소매로 수줍은 얼굴 가리시며 환하게 웃으시던 젊은 날의 어머니는 예쁘셨구나! 그렇게 머나먼 고향의 뻘밭과 물웅덩이를 기웃거리던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봄 소리’는 찾아왔다 한 눈 좀 팔고 거친 누구와 싸움도 한 판 하고 나니 어느새 목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새삼 ‘까투리’의 말을 무시하다가 죽은 장끼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 도 없다 그러기엔 어린 꺼병이 자식들이 너무 커버렸다. ‘놀란 까투리 한 마리 푸드득 하늘 박차’ 오르기 전에 ‘봄 소리’, 봄의 서곡을 가슴으로 들어야 하는 이유다.

 

‘아직은’ 시인의 고향인 마산 앞바다의 밤 파도 소리도 왠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나 산수유 샛노란 눈꼽이 떨어지고 가까운 산등성이에 분홍 진달래 흐드러질 때쯤이면 기다리던 ‘봄 소리‘가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흐르고야 말 것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그렇게 믿는다.

 

 

 


포토

더보기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