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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사람/ 권지영

권지영(1974~)

부산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성장했다 스무 살에 ‘여백 문학회’에서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고 경희대 국제한국 언어 문화학과에서 공부했으며,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하였다. 저서로는 ‘꿈꾸는 독서논술’ 시집 ‘붉은 재즈가 퍼지는 시간’, ‘누군가 두고 간 슬픔’ 동시집 ‘재주 많은 내 친구’ 등이 있음



강건하면서 부드러운 부릅뜬 두 눈
어떤 말도 하지 않으나 슬퍼서 따듯한
굳게 다문 입술,
내가 살아있는 이유에 대하여 바라본다
작은 두개골,
일찍이 그대는 무게의 중심을 비웠지만
전쟁터에서 살아 나온
커다란 두 발로 생을 걸어간다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걷는
앙상한 걸음,
당신의 살아 있는 눈빛을 기억하기 위해
그림자를 따라간다
어둠 속에서도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는
커다란 발자국.

시 읽기/ 윤형돈


이 시의 모태는 인체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이란 작품에서 기인한다. ‘걸어가는 사람’의 당위성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 옹호한 적이 있다.

‘우리는 걸어가는 사람, 우리는 실패하였는가? 그렇다면 더욱 성공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에 계속 걸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멀리 나아갈 가능성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환상 같은 감정일지라도 무언가 새로운 것이 또 다시 시작될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계속 걸어 나가야 한다.‘

시인은 우선, ‘강건하면서 부드러운 부릅뜬 두 눈’과 ‘굳게 다문 입술’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이유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물음을 던진다. 얼핏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라도 어디론가 걷게 만들 것 같은 동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작은 두개골’과 같이 무게 중심을 완전히 비운 것은 거추장스러운 육질을 제거해 버리고 가벼운 도보 리듬을 타기 위한 전주로 보아야 할까.

걷고 걸어서 마침내 처절한 삶의 ‘전쟁터에서 살아나온’ ‘커다란 두 발’의 족적은 위대해 보인다.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한 걸음 한 걸음 또 걷고 걷는 두 발의 숙명적인 여로(旅路)! 오호라, 임종 직전의 수술실 침대 맡에 삐죽 나온 어머니의 닳고 해진 마지막 두 발의 기억이 슬프도록 사무친다.

상처받고 손상되기 쉬운 인생노정이지만, ‘걸어가는 사람‘의 발길은 굴하지 않고 전진한다. ‘앙상한 걸음’은 노골적인 고독의 표출이지만, 뚜렷이 ‘살아있는 눈빛’의 그림자를 수반하기에 외롭지 않다. 어둠 속에서도 생의 전 방위로 나아가는 ‘커다란 발자국’은 추구할 것을 계속 추구하고 빼빼 마르도록 버릴 것은 계속 버리라는 ‘간결화’의 지상 명령일 터이다.

고용한파는 갈수록 매섭게 몰아쳐 인력시장은 새벽부터 일감을 얻으려는 일일노무자들로 붐비고, 초미세먼지로 거리엔 마스크 착용한 군상들이 난무하니 도대체 어느 하늘 아래서 마음 놓고 가슴 펴고 걸어갈 수 가 있을까 과거시험이 되어버린 ‘공시족’들의 좌절이며, 여섯 가지를 포기한 ‘육포(六抛) 세대’로 들끓는 청춘들과 맞물려 주말 경마장 가는 길목은 ‘출애굽기’를 방불 하는 구름 행렬로 꼬리를 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환상 같은 현실일지라도 무언가 새로운 것이 또 다시 시작될 것이다. 불가항력의 싸움터에서 이순신의 울돌목 승리는 天行이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사람’은 그렇게 ‘어떤 말도 하지 않으나 슬퍼서 따듯한’ 자기만의 길을 혼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는’ 키 크고 앙상한 ‘커다란 발자국’은 ‘당신의 살아 있는 눈빛을’ 또렷이 기억하기에, 권지영시인의 착한 영혼의 자유 의지가 사붓이 찾아가는 그 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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