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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산성> 한성 백제의 영광 하남 ‘이성산성’



백제의 왕자 두 명이 머물렀던 위례성의 별관 요새

전설에 따르면 “백제의 왕자 두 사람이 하남 춘궁동 이성산에 거주 하였다”하여 이성산성이라고 하는 사적 제422호 이성산성은 높이 209m에 위치한 포곡형 석축산성이다. 한성백제의 본성인 위례산성과 인접해 있는 관계로 백제의 산성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한성백제시대 이후 신라에 의해 점령되고 증개축 되어 신라산성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 하남 이성산성의 초입

실제 1986년부터 2003년 까지 이 산성을 조사한 한양대박물관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신라계열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성산성의 입구는 송파구에서 서하남로를 따라 가는 길목에 있다. 산성 입구의 초입은 개인 땅이 많았는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산성을 찾는 이들을 위한 배려가 없어 주차조차도 어려웠다.

이성산성의 입구라는 표지를 따라 올라가는 길 양옆으로 늘어진 보기흉한 펜스들은 하남시와 자영업자들 간에 타협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산에만 가면 어디서나 보이는 무덤, 사람 키 높이를 넘는 철조망 같은 펜스 등 유서 깊은 유적지의 초입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경사진 산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초입과는 다른 형태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의 정성이 들어갔다는 것을 그대로 알 수 있는 유적 안내가 시작된다.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되면 이성산성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남문지를 제일먼저 만나게 된다. 남문지 옆에는 이성산성에 대한 하남시민들의 남다른 자부심이 배어있는 안내판이 나온다.


    ▲  산성 하단의 저수지

이성산성의 하단부에 해당하는 남문지와 남문지를 끼고 마치 ‘해자(물 또는 물길을 이용한 성곽방어 시설)’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저수지는 2차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저수지를 두 번째로 개축할 때, 처음 만들어진 저수지를 준설하고 그 위에 석축을 했다고 한다. 저수지를 둘러쌓고 있는 석축은 50×20×30cm의 돌로 5cm 가량 들여쌓기(옥수수 모양)를 했다.

이런 방식의 축석양식은 고구려의 축성 양식이다. 저수지의 크기는 어림잡아 테니스장 한 면 정도는 되어 보였으며, 저수지 상류에는 저수지로 물을 흘려보내는 ‘이성산성약수터’가 있으나 식음은 불가능 하다. 저수지와 남문지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양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에 있는 길은 이성산성의 동문지로 가는 길이며, 왼편은 성내 건물터로 가는 길이다. 산성의 지형학적 특성상 어느 길로 가던 다시 만나게 된다.

   ▲  동문지 가는 길


   ▲ 상부에서 바라본 이성산성 동문지

동문지로 올라가는 길은 내내 가파른 경사길이다. 경사가 심한 길에는 토사의 유출을 막기 위해 통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통나무를 가져다 설치한 것이 이성산성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렸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갈림길이나 경사길 마다, 이정표와 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이 손쉽게 등산을 하거나 유적을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는 점이다. 10여분 정도 가파른 경사 길을 올라가니 하남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성산성 동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성산성 동문은 삼국시대의 산성성문들이 대개 그러하듯 ‘현도문’이다. 과거에는 이 성문에서 사다리를 내려주어야 출입이 가능했었다고 할 만큼 가파른 경사위에 문이 만들어졌다. 문의 출입구조는 ‘ㄱ’자 출입 구조이다. 뜨문뜨문 백제의 중요 산성들이 일본식 성곽의 특징인 ‘ㄱ’자 출입 구조(마스가타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방어시스템의 일종이다. 일본의 성들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마스가타 출입구조 양식은 ‘ㄱ’자 출입구조가 공격과 방어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백제에서 일본으로 그 기술이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국의 서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일본 왜성들의 모든 출입구조가 하남 이성산성의 출입구조 형태와 유사하다. 출입문의 깊이는 적어도 4m는 넘어 보였으며, 그 한가운데 문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고구려 성곽과 백제 성곽에서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들이 이성산성에서도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



   ▲ 산성 내부의 식물들에 대한 안내가 잘 되어 있다.

동문을 뒤로 하고 북쪽으로 발을 돌렸다. 산성을 걷는 길 중간 중간 이성산의 표본식물 앞에는 나무의 이름과 유래를 적은 표지판들이 보인다. 아마도 하남시가 이성산을 역사교훈의 장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듯하며, 이성산성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과 정성이 느껴졌다.

북문지로 가는 길에 성 내부시설물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성산의 정상부에 있는 건물지는 총 3개로 장방형 건물터와 8각, 9각 건물터가 남아 있다. 하남시에서 이곳의 잡초와 잡목들을 치우고 건물 유적을 비교적 잘 보존해 놓았다. 장방형 건물지의 크기는 3,202×788cm 이다. 약 76.5평 정도의 공간에 건물이 있었다는 흔적의 돌들이 사다리꼴 형태로 놓여 있다. 온돌 구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창고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며, 9각 건물지와 8각 건물지는 각각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던 건물의 유적이라고 한다.


    ▲ 이성산성 내부에 있는 건물지


   ▲ 성벽 넘어 보이는 외부 환경

건물지의 북쪽으로 가면 북문지가 나온다. 북문지는 아직 동문처럼 복원이 되지 않고 흔적만이 남아 있다. 북문지와 서문지 사이의 성벽길은 가파른 절벽위에 길이 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직 복원이 덜 된 무너진 성벽위를 걸어가는 셈이다. 성벽 아래는 거의 절벽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파르다. 절벽 위에 성곽을 축성한 백제인들의 기술은 예나 지금이나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성곽 내부의 구조는 백제의 것과 많이 다르다. 이곳을 발굴한 한양대박물관 측은 이성산성은 백제가 처음 축성한 것을 고구려와 신라가 차례로 점령하면서 자신들의 필요성에 따라 보축해 사용했다고 한다. 백제의 전형적인 산성인 오산 독산성이 테뫼식 산성위에 오밀조밀한 구조와 복잡한 내부구조를 이용한 방어체계를 구축했다면 이성산성은 포곡식 산성위에 민관일체식에 가까운 읍성 형태를 띠고 있다.

한편, 이성산성을 둘러싼 성주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고고학계의 신라산성 주장에 대해 하남시 향토유적 관계자들은 한성 백제시대의 중요한 유물이고, 동문의 ‘마스가타구조(출입문의 ㄱ자 구조)는 일본에 전수된 기술인만큼 백제의 유적으로 분류해 달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들의 이런 주장에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산성이 위치한 ‘춘궁동(春宮洞)이라는 말에서 ’춘궁(春宮)‘은 왕세자의 별칭 또는 왕태자가 머무르는 장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백제의 황태자가 이곳 이성산성에 머물렀다는 그들의 자부심이 지금의 이성산성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하남의 이성산성은 하남시가 역사현장으로 유적을 보전하겠다는 목적에 맞게 잘 보존된 편이다. 또한 둘레길 관리도 어느 성터에 비해 훌륭한 편이다. 성 내부 구조를 잘 살필 수 있도록 배려한 점과 성 내부의 길과 길 사이를 잘 연결한 점은 다른 산성에서는 보기 어려운 하남시와 이성산성 관계자들의 정성이라고 생각됐다.

하남시는 지난 1989년 광주군 동부읍에서 시로승격 된 후 시민의 날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매년 하남문화축제를 개최해 오다 하남의 지역성과 정체성을 찾고자 축제명칭을 공모해 초기백제의 도읍이라 주장되는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성"의 이성을 빌어 지난 2003년부터 이성문화축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전경만 기자 jkmco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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