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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가장 위대했던 화성의 삼일운동

불의에 대한 격렬한 저항정신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다

삼일만세 운동으로 촉발된 대한민국의 독립역사는 세계 200여국의 독립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이다. 또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외친 “대한독립 만세”는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독립으로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피 눈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경기도 화성의 삼일만세운동은 격렬함에 있어 대한팔도 제일이었다. 화성의 만세운동을 단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화성에서의 만세운동은 분명하게도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특히 화성에서의 삼일운동은 자발적이면서 민중적인 참여가 돋보였다. 민중의 자발적 참여는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성에서 만세운동의 와중에 일본인 순사 2명이 죽는 일까지 겹치면서 제암리 학살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 일제 강점기인 1920년 개교를 한 화성 송산면의 송산 초등학교 정문에 만들어진 태극기

이 자리에서 삼일만세운동이 열렸었다.

 

화성에서의 삼일운동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화성동부보다 화성서부에서 더 격렬하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장안, 우정, 조암, 사강 등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만세운동은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격렬하게 일어났다. 화성민중들의 격렬한 저항을 잠재우기 위한 일제의 만행은 제암리 참사로 이어졌지만 해방이후 지금까지 일본은 이에 대한 정식 사과는 물론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화성에서의 만세운동이 동부가 아닌 서부에서 더 격렬하게 일어난 이유가 밝혀진 것은 없다. 화성 서부는 예나 지금이나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바닷가로 나아가 조금만 일을 해도 먹을거리를 장만할 수 있었던 곳이 화성 서부지역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화성에서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 송산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삼일운동기념비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하 다 열거하기는 힘들지만 몇몇 사람은 정말 특이한 이력이 있다. 그중 3`1운동당시 우정면 화수리에 거주 했던 송종혁 열사는 화성에서의 만세운동이 얼마나 격렬하고 저항이 심했던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송종혁 열사의 출생지는 충북 괴산이지만 삶의 터전은 화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 열사는 삼일운동이 시작되자 차희식, 차병희, 장안면 석포리 이장 차병헌, 장제덕, 장소진, 이영쇠 열사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손 열사는 조암 장터에 모인 2천여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 손 열사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장안면사무소로 행진했다.

 

장안면사무소에 들어선 손 열사는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다시 우정면사무소에 들려 우정면사무소가 보관하고 있던 각종 서류 등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뿐만 아니라 손 열사는 오후 다섯 시 경에 시위 군중과 함께 화수리에 소재한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화성민중들의 분노를 보여줬다. 그러나 격렬하게 대한의 저항정신을 보여주었던 손 열사는 당시 출동한 일본 경찰의 총탄에 의해 그 자리에서 순직했다.

 

이렇듯 화성에서의 독립운동은 비폭력이라기보다는 폭력을 동반한 거친 저항이 심했다. 장안면 수촌리 사람이었던 차인범 열사도 손 열사처럼 거친 저항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 중에 한 분이다. 차 열사는 1919년 4월3일 정오 경, 당시 수촌리 구장이었던 백낙열 열사의 연락을 받고 ‘장안, 우정 지역의 3`1만세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쌍봉산에 모인 주민 2천여여명이 우정면 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 순사 ’가와바다‘를 처단할 때 동참 하는 등 민중이 중심이 되는 저항운동을 보여주었다. 이후 차 열사는 일제로부터 징역 10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차 열사는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에 못 이겨 22세의 젊은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 하셨다.

 

▲ 송산 사강일대에 조성된 독립운동마을 기념물 들

 

또 다른 형태의 민중운동을 이끌었던 화성 사람 중 한 분이 바로 홍원식 선생이다. 홍 열사는 화성 향남면 제암리 넘말 사람으로 본관은 ‘남양’이다. 홍 열사는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의병투쟁을 벌이며 대한의 독립에 힘써왔던 분이다. 원래 홍 열사는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다. 그러던 중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울분을 참지 않았던 홍 열사는 의병을 조직 해 충청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홍 열사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14년 3월29일 자신의 고향인 화성 제암리로 돌아와 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에 매진했다. 또한 홍 열사는 제암리 교회의 안종후 열사와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교인 김성렬 열사와 함께 ‘구국동지회’를 결성해 꾸준히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홍열사는 결국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 학살만행사건으로 인해 결국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큰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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