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은 남한과 북한을 폐허로 만든 대사건이었다. 1950년대에는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처음 실시해보는 자주적인 선거가 있었고, 북한과 남한은 나름의 정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영향력 있었던 사람들은 남북한을 오가며 통일에 대해 논의 했었지만 결과는 남과 북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남과 북간의 전쟁은 세계역사상 처음 벌어진 이념전쟁이었으며, 다국적군이 참가한 또 다른 형태의 세계대전이었다. 훗날 6`25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의 승자는 없었다. 대신 피해자는 있었다. 전쟁에 참전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소용돌이를 피해 난민을 신청했으며 한반도가 싫다며 나라를 등진 사람도 많았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반면 6`25 전쟁 덕을 본 나라도 있었다. 바로 일본이었다.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전쟁기간동안 미군의 군수기지 역할을 했었던 일본은 기적적으로 폐허 속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2차 대전 말엽,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건물다운 건물조차 사라지고, 모조리 불타버렸던 일본은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할 시점에 있었다. 다행히 미군의 병참역할을 통해 기사회생을 한 일본은 한국전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섰다.
일본에 이어 다시 일어선 국가는 한국이었다. 지난 1950년대의 한반도는 공장하나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지독하게 일을 했고 또 부지런했다. 그리고 굶주림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에 모든 것을 투자한 바보 나라이기도 했었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그 선택이 지금 한국의 위상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북한도 사정은 비슷하다. 압록강까지 후퇴했어야 했던 북한군이 중국의 도움을 받아 3`8선에서 휴전을 결정하고 돌아선 북한에게 남은 것은 모든 것이 불타버린 국토뿐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북한은 헐벗고 굶주리는 못사는 나라의 대표라고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보다 먼저 위성을 쏘아 올렸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도 있고, 대학도 있으며 아파트도 있다. 그런 것을 보면 북한 사람들이 외계인이거나 다른 인종은 아니고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 맞는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남한과 북한은 반세기가 지나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주적의 개념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세계인들은 2차 대전이후 가장 가난했었던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그리고 기술수출국에서 문화수출국을 넘나드는 한국을 바라보며 한국인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금 우리만 여전히 북한에 대한 시선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한국 정도라면 북한을 바라보는 기술적인 시각이 바뀔 때가 됐다. 막연한 주적이 아닌 북한에 대한 분명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설득하고 함께 해보려는 노력들이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한반도의 주변 지평이 넓어지면서 앞으로 벌어질 세계사에서 한국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역사왜곡과 동북공정 러시아의 신 팽창주의 그리고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영연방 패권주의 등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 없다. 그런 와중에 믿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불굴의 의지를 소유한 한민족 이라는 사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