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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맹기호

맹기호(1955~) 시인 서양화가

충남 아산, 경희대 대학원 졸업
1998년 ‘문예사조’로 등단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한국미술협회 회원
수원문인 협회 부회장, 수원 일요화가 회장
영덕중, 상촌중, 매탄고 교장 역임
시집 ‘그리워서 그립다’ 출간
2015 자랑스러운 수원 문학인상 수상



동그랗게 솟는 순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격한 음성을 듣자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그 길에 묻힌 이의 가르침은 알 바 아니다

눈을 들면 왜 보이는가
그 길에 묻힌 이의 통한을 알 바 아니다

오늘은 기쁜 날
미치도록 화나는 날
꺼럭을 털자 솟는 방울로

시 읽기/ 윤형돈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에서 이같이 노래했다. 맹기호 시인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존재 탐구’라는 말을 언급했는데, 존재의 뿌리는 결국 원형의 혈관(血管)인 어머니, 고향, 사랑으로 귀속할 수밖에 없다. ‘BLOOD(피)’라는 시의 첫 행에 등장하는 ‘순수’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적인 언어로 자신의 실존적 실체를 밝히는 일은 무엇보다 시의 본령인 상상력의 형상화를 도모해야하기 때문에 그 화두(話頭) 자체가 대단히 현학적이고 난해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언어로 세상을 다 표현하고 명명(命名)할 수 있다고 오해하지만, 말로 세상을 다 그려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사람은 언어 체계를 통해 세상을 나름대로 정리해야할 당위적인 절박함을 지니고 있다 자기 나름의 지식 체계로 세상을 해석하지 않으면 무언가 두렵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언어를 통해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아당착에 빠지기도 한다.

사각의 링에서 벌이는 피 터지는 싸움도 링 밖에선 ‘동그랗게 솟는 순수’였다 링에 한 번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났을 것인가 어쩌면 ‘충성과 명예, 사랑을 위하여 내 한 목숨 바치리라‘는 ‘피의 맹세’를 주문하듯 외우고 또 중얼거리면서 우리는 삶의 현장으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작자는 에둘러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격한 음성을 듣자’고 표현했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은 시인에게 결정적인 존재 탐구의 화두가 된다. 사실 인생이란 진영(陣營) 안에서 이 한 마디의 화두를 놓고 철인이나 식자(識者)들 간에 얼마나 많은 논쟁과 고뇌의 가르침이 오고 갔던가 그러나 아직도 그 명확한 해답은커녕, 한낱 ‘그 길에 묻힌 이의 가르침과 통한’이 되고 말았다.

통한과 쌓인 원한은 씻김굿이 필요하다 ‘명량(울돌목)’ 전투의 이순신 해군 제독은 전장에서 죽어간 원혼들을 향해 ‘이 많은 원한을 어찌할꼬!’ 피의 눈물(血의 淚)로 통탄했다지만, 시인은 여기서 ‘알바 아니다’ 냉정한 초연함을 유지한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해한 ‘천행’으로 밖에는 풀길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생명의 피돌기 현상인 희로애락의 혈액순환은 날마다 계속되어 ‘기쁜 날’과 ‘미치도록 화나는 날’의 감정 선을 수시로 왕래한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받는 꺼럭(꺼끄러기)의 까칠까칠한 장애물도 처음 ‘동그랗게 솟는 순수’의 원액인 ‘솟는 방울’로 전신을 흐르게 해 따뜻한 생명의 약동을 느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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