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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國人 약산 김원봉

 

 

약산(若山)은 일본 사람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대표 독립운동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 중에 대한국인으로 칭송되는 도마 안중근 선생이 있다. 안 선생은 지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에게 외교권까지 빼앗기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안 선생은 인재 양성에 힘을 썼다. 1906년에는 ‘삼흥학교’를 1907년에는 ‘돈의학교’를 세웠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또 한일신협약에 의해 우리나라 군대가 장제 해산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의병 운동에 참가하고 참모장까지 오른다. 그런 던 중 운명의 날이 온다. 1909년 10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와 회담 때문에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것을 알고 민족의 원흉을 저격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일본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가신 안 선생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적 인물 중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각인된 사람이다. 그런데 최근 약산 김원봉에 대한 서훈 문제를 놓고 안 선생은 되고 약산은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약산 김원봉 열사가 월북을 하고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것 때문에 서훈을 할 수 없다고 하며 정부에 대한 비난까지 하고 있다.

약산 김원봉의 약력을 잠시 살펴보면 약산은 삼일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인 1919년 11월9일 중국 길림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한다. 의혈단은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매국적 인사,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등을 처단하기로 결의 한다. 이후 이들의 활동 때문에 일제는 약산 김원봉에 대해 한일합방이후 사상 최고의 현상금을 내걸기 까지 했다.

그러나 약산은 훗날 대한민국으로부터 서훈조차 받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결코 그의 활동이 안 선생에게 뒤지지 않는 활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남한에서는 사상검열에 걸려 그가 대한국인중 한명 이었다는 것을 애써 모른 척 했다.

이차대전이 끝난 직후 프랑스 해방의 선봉에 서있었던 드골은 “자본주의이건 공산주의 이건, 그것은 국가를 경영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민족을 배반한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며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인들을 모조리 처벌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약산의 업적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일이다.

좀 달리 생각해 보면 대한국인으로 추앙받는 안 선생의 주요 활동 근거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안 선생이 해방직후 까지 살아계셨다면 ‘당시블라디보스토크’를 기점으로 퍼져나간 공산주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월북도 점쳐볼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오늘날에는 친일의 후예들에 의해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을 가능성도 높다. 마치 약산 김원봉처럼 말이다.

역사는 궤변을 늘어놓지 하지 않는다. 도마 안중근, 백범 김구, 약산 김원봉, 한지 김상옥 등,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모든 이들은 남한이나 북한의 이념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고 그저 한국인, 모두 大韓國人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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