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서민의 생활이 더 궁핍해진 이유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가 아니고 양반들에 의해 땅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개전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했다. 정확히는 부산포에 상륙한지 28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성을 점령했다.
경이적인 속도라고밖에 볼 수 없는 왜군의 속도전이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의병들이 나타나면서부터다. 정규군은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나선 농민군들이 일본군의 보급을 중간에 끊어먹으면서 왜군의 고전은 시작됐다. 평양성과 의주가 코앞인데 보급이 끊어지기 시작한 일본군은 함경도에서부터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성을 철수하면서부터는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했으며 의병이 될 수 있는 남자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정유재란까지 무려 6년 동안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은 말할 수 없이 많다. 지금은 영호남 해안가 일대에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의해 만들어진 왜성 28개가 당시의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웠던 양반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임자 없는 땅이라며 의병에 나섰던 양인들의 토지를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때 동인은 서인의 행태를 눈감아 주고, 서인은 동인의 부패를 모르쇠로 일관했다.
결국 의병에 나섰던 사람들이 유리걸식을 하며 떠돌면서 조선의 재정은 최악의 상태가 된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는 임진왜란의 공신을 책봉했지만 책봉대상의 대부분은 의병이 아닌 자신을 호종했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연히 백성들의 유리걸식은 그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과거의 이야기인데 지금이라고 달라진 것이 있을까?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평생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서도 욕심을 부리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욕심을 부리는 자가 기업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개인이거나 특히 공직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기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야 할 공직 후보자가 부동산 투기에 연루되었다는 소식과 그런 공직자를 공천하지 말라는 쓴 소리가 여기저기 나돌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정당이 선조시대 백성들의 토지를 탐했던 양반들과 무엇이 다른가 묻고 싶다. 부동산투기는 사생활이라며 입으로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웠다”고 줄곧 주장하는 그들의 모습은 흉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부동산 문제 때문에 정권이 바뀌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정당이 서민을 위한 정당인지, 아니면 오직 정당을 위해 정당을 위한 정당정치만을 일삼는 꾼들인지 헤아려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