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불과 6개월 앞둔 시점에서 정치적 색채가 짙어지고 정책대결이 곧 시작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원내·외 의원들과 기초의원들 간의 유대를 통해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시기가 지금이다.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기나긴 여정의 출발점에 앞서 각 정당은 정당의 뿌리를 맡고 있는 기초의원들의 부패와 도덕적 해이에 대해 점검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각 정당이 기초의원 정당 공천제를 포기하지 않고 유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기초의원 출마자 중 좋은 후보를 고르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도가 심화하면서 이 장치는 여러모로 악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자질이 부족한 후보들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는 일까지 빈번해지고 있다. 그 결과가 기초의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왔다. 올 한 해를 장식한 기초의원들의 음주 해외여행, 부정 청탁 방지법 위반, 토론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 부동산 투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뉴스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심지어 기초의원이 시 산하단체의 일부 기관장들에게는 등기 청첩장을 보내고 시청 공무원들에게는 직접 청첩장을 전달하는 일까지 보란 듯이 벌였다. 이런
오산시의회가 해외 공무출장과 관련 망신에 가까운 언론의 지적을 받은 지난 10월 이후, 오산시의회 전도현 의원이 출입 언론인들을 상대로 한 ‘오산시 언론관련 예산 조례안’을 발표하자 언론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전 의원이 제안한 조례안의 내용 이전에 ‘지역 언론 진흥’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지역 언론을 육성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먼저 밝혀 둔다. 지역 언론 육성은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거대자본으로 움직이는 중앙언론에서 소외되는 지역의 현실을 시민들에게 더욱 심도 있게 알리고자 만들어지고 있는 제도다. 이 제도를 악용해 지역 언론을 향해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는 민주주의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먼저 ‘오산시 언론 관련 운용 조례안’과 관련된 제3조(적용대상) 2호 주간신문과 관련 조례안은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 다목 또는 라목에 따른 신문으로 ‘오산시에 본사를 둔 신문사’로 제한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본지가 주간신문은 아니지만 주간신문을 운영하고 언론사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인터넷 언론사도 비슷한 경우다. 인터넷 언론사의 경우 아주 극소
한국에서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훌쩍 지나가면서 지방자치제도는 나름 자리를 잡아가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 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도 일탈이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자치와 민주주의라는 커다란 흐름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아쉬운 일은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자만이 우리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 중의 하나가 지난 8월에서 10월 사이에 발생한 오산시의회 파업과 공무 여행이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오산시의회의 8월 해외 공무 여행은 관광성 외유이며, 지나치게 방종했다는 언론의 질타를 일시에 받았다. 그리고 이어진 임시회에서 오산시의회는 지방자치단체의 수장에게 오산시의 예산심의를 무기로 권력남용을 강요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의원 개인의 일탈이겠지만 일부 산하기관 단체장들에게 등기 청첩장을 보내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런 문제들을 엄밀하게 따지면 청탁금지법(김영란법), 공무원 윤리강령 등에 해당하는 사안이지만 시끄러움보다는 함께 손을 잡고, 세상 풍파에 지친 오산을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보자는 오산 공동체의 의지와 시민들의 너그러움으로 흐지부지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오산시의회
최근 들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오산시는 위태로워 보인다. 강경일변도의 시장과 시장에게 시의 예산심의권을 볼모로 잡고 위법과 탈법을 강요하는 시의회의 행태는 민주주의에 대해 잘못된 해석과 이해가 가져온 심각한 위기다. 그럼에도 시장의 잘못이 크다는 것은 시장이 애초에 시장이 되려는 목적을 잠시 상실한 듯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권재 시장이 오산시장이 되어보고자 했을 때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주변 도시가 나날이 성장하는 것에 비해 정쟁에만 몰두한 오산시의 발전이 너무 더뎌, 이래서는 오산이 경기 남부의 여러 도시 중에 제일 형편없는 도시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오산시장이 되어보고자 했던 꿈이 있었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그리고 오산시를 발전시켜보겠다는 청사진을 크게 그렸다. 그 청사진들이 오산시민들에게 충분히 전달된 것은 아니지만 오산시 발전, 경기 남부의 ‘강소도시 오산’ 이라는 꿈에 동화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어렵게 시장에 당선됐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부지리로, 또 어떤 사람들은 상대 당의 자중지란으로 당선됐다고 말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권제 시장은 지난 어느 역대 시장보다 실제적이고, 오산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태풍 카눈이 올라오던 지난 8월 중순, 오산시의회 의원 6명은 한 사람당 시비 460만원을 지원받아 북유럽 3국 해외연수를 다녀왔다. 그리고 보조 인력으로 의회 공무원 5명도 시비를 지원받아 북유럽에 다녀왔다. 이 예산 금액이 무려 5,000만원 상당이다.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하더라도 일반 서민들이 북유럽 여행을 하기는 어렵다. 우선 경비부터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오산시의원들은 해외연수를 위해 시에서 460만원 상당을 지원받고, 여기에 자비 200만원 이라는 거금을 더해 다녀왔다고 한다. 물론 의원보조로 동행한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상식적으로 이해는 안가지만 공무원들도 자발적으로 자기 돈 200만원을 더해 출장을 다녀왔다고 한다. <전경만의 색깔있는 이야기> 오산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비 200만원 이라는 거금을 들여 출장을 갈 수 있는 공무원들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삶의 경험을 되돌려봐도 의원이 아닌 공무원이 자비로 그것도 9급 공무원의 초봉 전액과 비슷한 금액들 들여 자발적으로 출장을 갔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북유럽을 다녀올 기회가 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비 200만원으로 6박9일간
파르티잔 혹은 빨치산이 등장하는 노래 중에 ‘벨라 차오(Bella Ciao)라는 노래가 있다. 알려지기로는 이탈리아 북부의 민요라고 한다. 오늘날 이 노래는 전 세계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버전이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나라 버전도 있다. ’벨라 차오‘라는 노래가 저항의 상징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세계 2차대전 당시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지난 20세기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와 독일 나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펼쳤던 비정규군을 마치 연인처럼 묘사한 노래가 ’벨라 차오‘다. <전경만의 색깔있는 이야기>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당시, 광화문에서 불렸던 여러 노래 중 하나다. 최근에는 모 광고의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다. 영화 ’종이의 집‘ 내용 중에 등장하기도 할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노래의 내용은 별것 없다. 굳이 내용을 요약하자면 애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는 파르티잔 용사의 각오를 나타낸 것이다. 20세기 초, 당시 시대상이 워낙 국경을 넘나들며 이데올로기적 광풍이 불던 시대이니 무솔리니한테서 도망 나와 투쟁했던 사람들과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여단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미래를 예측할 때 과거의 역사를 불러오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크고 작은 일이 한 두 개는 아니지만, 한반도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역사적 사실은 크게 고려말의 왜구침략과 임진왜란 그리고 지난 1910년 경술국치(국권피탈, 한일합방)로 이어진다. 일본과 있었던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한 번도 일본을 침탈한 적이 없지만, 일본은 늘 한반도를 원했다. 단순하게 식량과 사람을 뺏어가기 위한 고려말의 왜구침략에서부터 명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던 임진왜란,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했던 경술국치까지, 일본은 역사상 늘 한반도를 원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근현대의 격동기에서 일본의 정치인들은 한반도 침탈에 선두에 섰던 인물들이 묻혀 있는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멈춘 적이 없다. 역사 이래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가장 좋아지고 있다는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 그리고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준군사적 합의를 하고 발표를 한 후에도 일본의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보내 알 수 없는 전의를 다졌다. 야
화성은 큰 도시다. 인구수는 100만에 가깝고 면적은 서울보다 1.4배 넓다. 그리고 성장권역에 속한 도시이기 때문에 제조장이나 공장의 설립이 쉽다. 공장이나 제조장의 허가 요건이 충족되면 화성시는 사업체와의 마찰을 피하고자 사업을 지속해서 승인해왔다. 그런 막 개발의 시간이 벌써 20년이 흘렀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화성의 동쪽 끝자락에 정부는 대한민국 최대규모의 신도시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당시를 살았던 화성 시민의 입장으로 보면, 화성시의 동쪽 끝, 개발의 호재가 엎어,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무관심의 땅에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인구가 늘어나면 좋을 것 같았다. 다들 환영 일색이었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이 되어가는 즈음, 화성시의 동탄은 불필요한 괴물이 됐다. <전경만의 색깔있는 이야기> 서울보다 1.4배나 넓은 면적의 화성시 중에서 오산보다 작은 동탄에 화성시 인구의 절반이 몰려 살면서 무려 16년간 동탄지역에 가까운 정치인들이 시의 수장으로 배출됐다. 이 때문에 화성시 안에서도 동탄은 막강한 정치권력과 행정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화성시의 서부는 갈수록 낙후되어 갔다. 절대적 낙후는 아니더라도 상대적 빈곤감은 화성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질 당시의 학교 분위기 중에는 ‘신체포기각서’라는 것이 유행을 했었던 적도 있었다. 2010년대를 전후해 고등학교에 다녔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잇는 내용들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작성하는 신체포기각서라는 것은 선생의 체벌에 항의하지 않겠다는 개인 서약 같은 것이다. 덕분에 학생들은 선생들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기합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선생들의 차별적인 행동들은 학생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이를 유념하는 선생은 적었던 시기가 그때이다. 그리고 선생들에 의한 차별과 폭력이 극에 달하던 때에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지난 2010년 9월 당시 교육감이었던 김상곤 교육감은 자신의 공약이었던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해 어렵게, 어렵게 공약을 만들었다. 학생인권조례는 지방자치단체별로 다르기는 하지만 주요 내용은 특별한 부분을 제외하면 대동소이한 편이다. 학생인권조례의 핵심은 선생들의 체벌 금지와 차별금지가 주를 이룬다. 선생에 의한 학생체벌과 차별은 학생인권조례가 시작됐음에도 수년간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고 차별금지는 조례상으로만 존재하는 문구가 된 지 오래다.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 결정을 둘러싸고 일본이 아닌 한국의 거대정당들이 답도 없는 소모적 논쟁을 벌이면서 혐오의 정치를 더 극성스럽게 저질화하고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한국 국민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어느 나라 정당이냐?”는 비아냥거림에도 흔들림 없이 일본 정부의 ‘안전하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며 득도 없이 일본 편에 서 있다. 반면 야당인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일본과 공범’이라는 입에 담기 어려운 표현을 써가며 비난에 비난을 더하는 초등수준의 극한으로 가고 있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우리나라의 거대정당들이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국민에게 어떤 방식으로 신뢰를 줄 것인가의 문제는 아예 생각조차 없는 것처럼 드잡이질을 반복하면서 갈수록 혐오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최근의 일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래도 따져봐야 한다면 우선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한 일차적인 책임자는 일본과 일본 정부다. 일본 정부는 오염수를 안전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해양에 방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자신들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관철하려 하고 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당시만 해도 그것이 2차 대전의 시발점이 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폴란드를 노리고 있었던 나라는 독일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폴란드는 무너질 것이라고 본 나라들이 많았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프랑스가 독일의 남침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일의 침공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마지노선이 뚫리자마자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 독일은 프랑스에 ‘비시정부’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후 프랑스의 비시정부는 연합국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고 파리로 진격한 1944년 8월에 사라진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독립에 일등 공신이 된 드골은 비시정부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처단했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프랑스 해방 이후, 프랑스는 비시정부와 나치에 협력했거나 자발적 노동을 제공한 프랑스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인다. 이때 가장 가혹하게 처벌받은 집단이 바로 언론이다. 나라를 되찾은 드골은 제일 먼저 언론개혁을 시작했다. 지난 1944년 9월, 프랑스 임시정부는 나치 혹은 프랑스의 비시정부에 순종한 언론사들 모두
뉴스가 온갖 추잡한 정쟁으로 뒤덮이면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수준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더 좋은 방향으로, 어떻게 하면 더 나을까를 논의하라고 했더니 반대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상대측 흠집 내기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이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정치는 삼류 중에서도 삼류다. 그 삼류 쇼를 매일매일 반복해 시청해야 하는 국민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정치인의 부도덕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지만 그것이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개발에 우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정치권은 오직 상대방의 부도덕만을 부각하게 시키는 것이 지상과제인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대통령 부인의 사생활에서 흠집을 찾아낸다 한들 그것이 대한민국을 정지시킬만한 것이 아님에도 오직 흠집 들추기 한길로만 빠지는 야당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전경만의 와이즈 칼럼> 그리고 야당 인사들의 과거 행적만 따라다니며 자신들의 정치적 실수를 야당 탓으로만 돌리려는 여당에서도 일말의 희망은 없다. 오직 실망만 가득할 뿐이다. 또한, 총선이 다가오면서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후보 예상자들끼리 오직 추문 들추기에만 바쁘